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노 아키히로 (문단 편집) == 현역 시절 == [[파일:yanochunichi.jpg]] [[주니치 드래곤즈]] 시절. [[주니치 드래곤즈]]에 입단하게 된 야노였지만, 이미 주니치에는 [[나카무라 타케시]]가 주전 [[포수]]로 확고히 자리잡았기에 나카무라에 비해 뚜렷한 장점이 보이지 않던 야노는 백업 [[포수]]나 [[대타]]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. 출장기회를 늘리기 위해 [[외야수]]도 겸업했지만 여전히 출장기회를 많이 얻지는 못했고, 이 와중에 후배 [[아라키 마사히로]]에게 입단 당시 등번호였던 2번을 넘겨줘야 하기도 했다. 이렇게 주전을 차지하지 못한 채 백업 포수나 외야수로 뛰며 선수생활을 이어가다, 1997년 시즌 종료 후 거포 [[1루수]] [[타이호 야스아키]]와 함께 당시 한신의 주전 [[포수]], 센터 [[외야수]]였던 [[세키카와 코이치]]와 주전 [[유격수]]였던 [[쿠지 테루요시]][* 1992 시즌 신인왕이자 '''역사상 최초 무홈런 야수 신인왕'''이었다. 주니치로 간 그는 유격수였던 [[이종범]]을 외야수로 보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정착하는 듯 했지만 끝내는 정착하지 못하였고 주니치의 유격수 자리는 [[이바타 히로카즈]]가 들어올 때 까지 랜덤으로 돌아갔다.]와의 2:2 트레이드로 [[한신 타이거스]]로 이적하게 되었고, 이 트레이드가 야노 자신의 야구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다.[* 여담으로 포텐이 터지기 전인 주니치 시절의 야노는 124타석에서 22병살을 기록할 정도로 끔찍한 타격을 보여준 적도 있을 정도라(...) 주니치 팬들은 야노의 트레이드를 대환영했다는 얘기가 있다.] [[파일:yanohanshincatcher.jpg]] [[한신 타이거스]] 시절.[* 야노가 한신으로 오기 직전 시즌인 1997년에는 일본야구 역사상 희대의 먹튀 [[마이크 그린웰]]이 저 등번호의 주인이었다.] [[한신 타이거스]]로 이적하면서부터 야노에게 전성기가 찾아오는데, 당시 [[포수]] 포지션이 확고히 고정되지 못한 채 매년 여러 선수들이 주전을 다투던[* 야노 이전에 한신의 주전 포수였던 [[세키카와 코이치]]는 나름 정교한 타격을 보유한 교타자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당시 역대 최저 도루저지율 신기록(1994년 .125)을 기록할 정도로 수비력에선 크게 평가받지 못했고, 그 뒤를 받치던 야마다 카츠히코는 수비에선 세키카와보단 나은 평가를 받았지만 타율이 1할대를 넘나들 정도의 빈타로 악명높았어서(다만 97년엔 238타석에서 타율 .262 4홈런으로 커리어하이를 마크했다.) 두 명 모두 쓸만한 포수라고 하기엔 다소 애매했다. 세키카와 이전에는 [[1985년 일본시리즈]] 우승 멤버이던 [[키도 카츠히코]]가 있었으나 이쪽도 노쇠화 등으로 85년 당시만큼의 존재감을 드러내진 못했고 이외에도 [[시오타니 가즈히코]], [[키타가와 히로토시]] 등 유망주들이 꽤 있었으나 이들은 끝내 주전으로 성장하지 못한 채 백업에만 머물렀다. 이 상황에서 야노가 한신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오타니와 키타가와는 모두 내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했으나 끝내 2000~2001 시즌 사이에 저 두명은 각각 [[오릭스 블루웨이브|오릭스]]와 [[킨테츠 버팔로즈|킨테츠]]로 트레이드되었고 그곳에서 뒤늦게나마 포텐을 터트려 주전으로 도약했다.] 한신에서 [[요시다 요시오]] 감독에게 [[포수 리드]]를 호평받아 이적하자마자 단번에 주전 [[포수]] 자리를 차지하였고, 이적 2년차였던 1999년엔 처음으로 [[규정타석]]에 도달하면서 3할 타율도 달성하였다. 이후 주니치 시절 감독이었던 [[호시노 센이치]]가 한신 감독에 부임한 후로도 계속 주전포수 자리를 맡았고[* 다만 야노 본인은 호시노가 한신 감독에 부임한다는 얘기를 듣고 처음엔 과거 주니치 시절 때의 트레이드 때문에 '''"또 버림받겠지"''' 라고 생각하여 실망했다고 한다.] 2003년부턴 FA로 이적해 온 [[카네모토 토모아키]]의 영향으로 오프 시즌에 신체 단련에 집중하며 맹훈련을 한 것이 톡톡히 효과를 보아 장타력 상승을 포함한 공격, 수비에서 크나큰 성장을 이루며 이 해 한신 타선의 [[하위타선]](주로 7번타자)의 주축으로써 '''타율 .328/OPS .897, 14홈런 79타점'''의 커리어하이를 찍고 한신의 18년 만의 [[센트럴리그]] 우승에 공헌하면서 데뷔 이래 처음으로 [[베스트나인]]과 [[골든글러브(NPB)|골든글러브]]를 수상했다. 이 수상은 당시 첫 수상으로썬 최연장인 만 35세에 달성한 것이었다. 다음 해인 2004년에도 전경기 출장을 달성하고 꾸준히 공수 양면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타율 .285/OPS .747 11홈런 65타점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고, 2005년에도 타율 .271/OPS .760, 19홈런(개인 최다) 71타점을 기록하면서[* 이 시즌엔 '''.279, 29홈런, 147타점'''을 기록한 [[이마오카 마코토]]와 .327, 40홈런, 125타점을 기록한 [[카네모토 토모아키]] 덕분에 하위타선에 있던 야노도 혜택을 꽤 보았다.] 또 다시 한신의 [[센트럴리그]] 우승을 이끌고 2번째 [[베스트나인]], [[골든글러브(NPB)|골든글러브]]를 수상했다. 이후 [[2005년 일본시리즈|일본시리즈]]에선 당시 [[치바 롯데 마린즈]]에게 투타 양면에서 일방적으로 압살당하면서 4전 전패는 물론이요 최소 득점, 무홈런, 방어율 8점대를 비롯해 '''3경기 연속 10실점, 총 스코어 [[33-4]]'''라는 온갖 [[흑역사]]를 창조해낸 한신 선수단 가운데 유일하게 3할 이상의 타율이었던 .417을 기록. 감투선수상[* [[일본시리즈]] 패전팀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선수에게 주는 상.]을 수상했다. 이후 2006년에도 타율 .274/OPS .766, 17홈런 78타점[* 여담이지만 이 78타점이 [[카네모토 토모아키]](98타점)에 이은 팀 내 타점 2위이었고, 그것도 중심타선을 맡았던 외국인 타자였던 [[앤디 시츠]](75타점)보다도 많았다!]을 기록하며 3번째 [[베스트나인]]을 수상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다가 2007년에 노쇠화가 시작되면서 타율 .236/OPS .639, 6홈런 42타점이란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고, 2008년에 [[2008 베이징 올림픽]] [[일본 야구 국가대표팀|국가대표]] 멤버로 뽑히는 등 마지막 불꽃을 태웠으나[* 4강 한국전에서 선발 포수로 출장했다. 당시 일본 선발 투수는 [[스기우치 토시야]].] 결국 노쇠화를 이기지 못한 채 2009년부터 [[카노 케이스케]]에게 주전 포수 자리를 내주며 출장기회가 급감하였고, 거기에 [[죠지마 켄지]]가 들어오면서 입지가 더욱 좁아지며 2010년 시즌 종료 후 현역에서 은퇴하였다. 통산성적은 '''1669시합 출장, 4921타수 1347안타, 112홈런 570타점 16도루, 103희생타 29희생플라이, 464사사구 1089삼진, 타율 .274/출루율 .335/장타율 .395/OPS .730'''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